2017/03/16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흰머리가 꽤 났다. 꽤 라는 표현도 부적절하다. 수북하게 났다. 새치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사실 내게 하얀색의 체모가 나는 문제는 하루이틀 된 문제가 아닌 것으로써, 지난 방학 침착맨처럼 수염을 길러 보겠다고 덥수룩한 산적 모드로 들어갔을 때 턱과 구레에서 솟아나오는 낚시줄 더미를 보고 말 그대로 경악을 한 적이 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흰머리라니, 미중년의 상징이기도 한 멋진 흰-회색 그라디안트 백모도 아닌 애매모호한 낚시줄 색깔의 머리가 이렇게 잔뜩 올라오다니 그야말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흰머리가 많았다(그때 당시엔 나이가 나이인지라 “새치”라고 칭하고 넘어갔다) . 부모님과 주변인들은 내가 어린 나이에 여러 이유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몸이 견디질 못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나름의 분석을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 짜리가 스트레스로 인해 흰머리를 발모시킨다는 것은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는 케이스로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낭설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 그러니까 열두 살이 되던 해의 여름에 “흰머리의 저주”에 걸렸다. 어쩌다가 그런 몹쓸 저주가 걸렸는지도 기억하고 있다.

그 해, 2004학년도에 같은반이 된 여자애가 하나 있었다.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스타일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나의 특이한 이성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열두 살의 내 눈에) 너무나 매력적인 여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좋아하면 좋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무렵의 남자새끼들이 늘 그렇듯이 난 그애를 쫓아다니면서 별 시답잖은 걸로 시비를 털고 다니기 시작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아이 아버지의 사진을 보게 됐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 분은 지금 기준으로도 꽤나 미중년으로서, 대한항공 조종사 유니폼이 엄청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우리 동네엔 예나 지금이나 항공조종사 분들이 꽤 많이 거주하신다). 멋있으면 멋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역시나 그 무렵의 남자새끼들이 늘 그렇듯이 나는 파일럿 모자 사이로 슬쩍 삐져나온 그의 흰머리를 발견하곤 엉뚱하게도 낄낄거리며 그 여자애를 아래와 같이 놀리기 시작했다.

“니네 아빠 흰머리, 니네 아빠 흰머리.”

예상에도 없던 니네아빠 흰머리 어택을 당한 그 친구는, 이내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고 말았다.

그리고 정확히 그 해 2학기부터 내 머리에 흰색 새치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지금까지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애 아버지가 대머리가 아니였단 점이다.